" 어느 한 청년의 인생 "
*** 어느 한 청년의 인생 ***
1849년 12월 러시아 사형집행소 세묘노프광장에서 사형대 위에 반체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28세의 청년이 있었습니다. 매서운 바람을 뚫고 집행관이 소리쳤습니다. “이제 사형을 집행하기 전, 마지막 5분의 시간을 주겠다”, 청년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세상과 작별할 시간은 단 5분 이었습니다. 5분 뒤에 그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운명이었습니다. 사형수는 절망했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 인생은 이제 5분 뒤면 끝이구나. 나는 5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는 제일 먼저 가족과 동료들을 생각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친구들이 부디 먼저 떠나는 나를 용서하게 하시고, 나 때문에 너무 많은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나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 말게 하소서”, 집행관은 2분이 지났음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사형수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후회할 시간도 부족하구나, 나는 왜 이렇게 헛된 시간속에 살았을까’
‘아주 짧은 찰라의 시간이라도 내게 더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다시 집행관은 마지막 1분이 남았음을 큰소리로 알렸습니다. 사형수는 두려움에 떨며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매서운 칼바람도 이제는 느낄 수 없겠구나, 맨발을 타고 올라오는 땅의 냉기도 더 이상 느낄 수 없겠구나, 더 이상 볼 수도 만질 수도 또 들을 수도 없겠구나, 모든 것이 아쉽고 아쉽구나’. 사형수는 처음으로 느끼는 세상의 소중함에 고요히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맞은 편에서 사격을 위해 대열을 맞추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조금만 더 조금이라도’, 그때 탄환을 장전하는 소리가 그의 심장을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한 병사가 소리치며 흰 수건을 흔들며 달려왔습니다. “멈추시오! 형 집행을 멈추시오! ” 사형대신 유배를 보내라는 황제의 전갈이 도착한 것입니다. 가까스로 사형은 멈췄고, 사형수는 죽음의 문턱에서 극적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 점은 그 사형수가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였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날 밤, 도스토예프스키는 담담한 어조로 동생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고 실수와 게으름으로 허송세월했던 날들을 생각하니 심장이 피를 흘리는 듯 하다. 인생은 주님의 선물이고, 모든 순간은 영원의 행복일 수도 있었던 것을 조금 더 젋었을 때 알았더라면, 이제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뀔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다} 이후 시베리아에서 보낸 4년의 수용소 생활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값진 시간이 되었습니다. 살을 파고 드는 혹한 속에서 무려 5kg이나 되는 무거운 족쇄를 메고 지내면서도 그는 창작에 몰두했습니다. 글쓰기가 허락되지 않았던 유배생활이었지만,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종이대신 머릿속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심지어 그 모든 것을 외워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유배생활을 마친 후, 세상밖으로 나온 그는 인생은 5분의 연속이라는 각오로 글쓰기에 매달렸고, 1881년 목숨이 다할 때 까지 수많은 불후의 명작을 발표했습니다. 그가 사형선고를 받았던 이유는 그가 열 여섯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농노들에게 살해되는 것을 보고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형수들을 싣고가는 열차가 간이역에 멈추었을 때, 그는 어느 부인이 불쑥 내민 작은 책 한권을 받았는데, 그 책이 바로 신약성경 이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사형날을 기다리고 있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그 성경을 읽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을 읽다가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훗날에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누군가 내게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라고 증명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리스도와 같이 있고 싶다. 나는 진리보다는 차라리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다. 기적으로부터 신앙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부터 기적이 나온다.”
도스토예프스키 – 그가 쓴 소설은 죄와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가난한 사람들, 백치, 백야, 악령, 미성년, 수많은 소설에 러시아에서 대표되는 문호가 되었다. 그의 인생에서 아마도 예수를 만나고, 극적으로 삶을 얻게 되고, 그리고 많은 소설을 쓰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영감을 주셔서 그렇게 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항상 마감에 쫓기면서 원고를 마감하고, 원고료를 받아서 살아가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았지 않았나? 생각을 해본다.
세상에서 죽음을 맛본 후의 인생이 참된 삶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사람은 어리석어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모르고, 자기가 제일인양, 모든 것의 으뜸이 되는 것인양, 자랑하며 뻐기며 교만하며 살아가게 되고, 결국은 헛되고 헛되도다 하며, 인생이 하릴없이 지나가 버렸음을 깨닫는다.
전도서는 이러한 삶의 모든 기본적인 것에 대해 깊이있게 알려주고 있다. 그럴지라도 사람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도 이 땅의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그저 자기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서 허랑방탕하면서 지낸다. 시간의 아까움, 생명의 귀중함을 모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생명이 떠나가고, 이제는 회개할 시간도 없이 지옥으로 꺼져 멸망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 90:10) - 모세가 기도하는 내용이다.
어느 목사님이 잠언서를 70번 읽고서 깨달은 내용은 = 하나님의 지혜를 얻으라, 지혜가 무엇이냐? 인생은 복잡하고 얽히고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너무 많도다. 순간마다 선택의 결단이 온다. 그 선택을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최선으로 귀결되어지는 일일까? 그러한 모든 것의 결단은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잠 3 : 14 – 15)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 9 : 10)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학문을 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지식이 출중하다고 해도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를 모르면 진리에 다가갈 수 없다. 잔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 : 32) 내가 신학을 하게 된 것도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알고, 먼저 신학을 알아야 학문의 근본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점에서 신학을 시작했는데, 그러다가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고, 이제는 하나님의 일군이 되고, 내가 선교사로 헌신한 것에 대해서 결코 후회함이 없도다. 많은 부를 소유했거나, 장사를 해서 많은 이득을 남겼거나, 공부를 해서 박사학위를 받아서 교수가 되었거나, 정치를 해서 자기 이름을 높이고, 세상에 알려서 인기를 얻고, 아름다움으로 미인대회에서 1등을 했다고 해봐도 예수를 모르면 그 모든 삶이 완전 허망한 것이로다. 아름다움도 때가 지나가면 모두 늙어가고, 쭈글텅이 되고, 권력도 시들해지고, 높은 지위에서 물러나면 힘없는 평민이 된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봐도 역시나 바닷가의 모래알 한알보다도 더 적은 지식의 양이다. 우주를 어떻게 알겠는가? 인간의 어리석음은 하나님을 알면서 자기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먼지보다도 더 작게 여기고,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는 데(사 40:17),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백성은 귀하게 여기고, 자기 자녀들은 철저하게 챙기게 되고, 우리는 하늘에 기업이 주어진다고 하니, 놀라운 기대감에 젖어 있다. 하나님을 믿으라. 주 예수를 믿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과 복을 주시리로다” (시 29 : 11)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시 73 : 28)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 144 : 15)
하나님이 삶의 원천이고, 생명의 기반이고, 초석이고, 생명의 근원이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과 그 인간은 삶이 헛되고 허망하다. 보람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하느니라.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품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기다리시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