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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동 민들레

  • 글쓴이 어린나무 날짜 2015.08.08 01:12 조회 2,281

이 원고는 2000년 초에 단국대학교 학교 교지에 1년간 연재되었던  논픽션 원고입니다.

기도해 주세요.


한 남 동 민 들 레

김 홍 주

 

나는 반맹증 환자다.

의학적으로 반맹증이란 병명이 있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난 스스로 나를 그렇게 부른다.

내 몸의 건강 정도는 내가 생각해도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내 반맹증 상태는 대나무 앞뒤에 구멍을 뚫어 양 눈앞에 대고 밖을 보면 작은 원이 보이는데 내가 볼 수 있는 부분은 3센티 정도로 뚫린 대나무를 눈알 앞에 붙이고 볼 수 있는 그런 시야 밖에 갖고 있지 못하다. 게다가 왼쪽 눈은 백내장이다.

또한 뇌손상으로 인한 몇 가지 후유증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왼쪽 청력이 약해져 고개를 돌려야지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이고 또 한 증상은 지리적인 위치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증상으로 이명 현상이 있는데, 사이렌 경음 소리 같기도 하고 때로는 물방울 터지는 소리처럼 들려 나를 혼란하게 만들곤 한다.

이렇게 내 몸의 건강 정도는 객관적으로 생각해 봐도 정상 이었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다.

이런 몸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떤 일을 택해 살아 랄 수 있단 말인가.

대학 졸업을 두 달 앞두고 1983년 1월 한국사립교장회의의 추천으로 강릉지역의 고등학교에 채용 확정 통보를 받았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닌 상태였다. 내가 과연 교사를 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로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어쩌면 교사라는 직분은 본래 내 의지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더욱 학생들을 가르치는 거룩하다고 할 수 있는 직업 중에 하나인 교사는 정말 내게는 큰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처음 교사로 교단에 서기 전에 많은 번민이 있었다. 과연 내가 아이들을 잘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 혹여나 부족한 나 때문에 아이들이 피해를 입으면 내가 어떻게 그 책임을 질 수 있다는 말인가. 이 고민은 나를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게 했었다.

과연 내가 감당 할 수 있는 선택인가?

 

나는 자신에게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그래 다시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는 거야. 물론 비바람과 폭풍우가 밀려오겠지. 하지만 80년 5월 보다야 더 하겠어. 너는 그 두려움의 시간을 이겨 냈잖아. 그래 서울을 떠나. 그리고 조용히 동해안 강릉 바닷가에 가서 아이들을 만나. 아이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잖아. 오징어 냄새 푹푹 풍기는 그 아이들이 “선생님 어서오세요. 저희들이랑 같이 놀아요” “저희들이 다 이해해요. 선생님은 목숨을 걸고 싸운 진정한 민주 투사였잖아요.”

하지만 내 머리 속에서는 “ 아냐. 그런데 나는 지리적인 기억이 잘 안되잖아. 만약 학교 안에서 교실 위치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 아이들이 그 사실을 알면 놀릴 걸 ”

“수업은 할 수 있는 거야? 너 옛날기억은 다 잃어버렸잖아. 미적분 수업을 할 수 있겠어?” 하는 질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럴 때 마다 “ 아냐. 난 그래도 그 상황에서 열심히 했었잖아.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이런 말들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나는 단국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 3학년 학생이었다.

그때 나는 장위동에 있는 가정집에 가정교사로 입주해서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가르치고 있으면서 평일엔 매일 학교 도서관 문을 제일 먼저 열고 들어가서 제일 늦게 닫고 나올 정도로 학업에 정진하고 있었다.

그 때 내 목표는 미국 오레곤 주립 대학으로 유학을 가려고 준비하는 단계였고, 훌부라이트 장학 재단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다.

온 대지에 따사로운 햇살이 언 땅을 녹이는 3월. 학교 범은정으로 올라가는 언덕 양지

에 때 이른 개나리가 노랗게 막 얼굴을 내미던 날, 도서관으로 무역학과 ‘이상규’ 선배가 찾아왔다. 그리고 나에게 자신이 학생회장에 출마하려는데 나에게 러닝메이트로 함께 출마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 선배는 도서관에서 자주 만나는 건실한 복학생이었다.

우리는 이따금씩 만나서 미래 한국 사회에 대한 비전과 젊은이의 이상향 그리고 세계사적 관점으로 볼 때 한국전쟁에 대한 의미, 박정희의 역사성 등에 대하여 토론을 벌리기도 했고, 기독학생반에서 만나서 기도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었다.

나는 며칠 후 선배의 의견을 수락하고 함께 학생회 부회장으로 출마하게 되었다.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 그 때 서울 대학가의 분위기는 민주화 운동의 열기가 서서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김대중 선생이 오랜 옥중생활에서 벗어나 한국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또한 김영삼 선생과 함께 민주주의의 화신이 되겠다고 굳게 맹세하던 시기였다.

그 때 각 대학의 학생회 간부들은 비밀리에 교합을 가졌고, 그리고 5월 서울역 집회 및 각 대학의 학내 시위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던 중이었다.

서울의 총학단에서는 우리 학교 시위 날짜를 5월 9일 오후11시. 소운동장 앞 집결. 이렇게 결정되었었다.

11시 전부터 우리는 학교 앞 노천극장에 미리 참모 학생들을 배치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조국의 민주화를 열망 하듯 역사적 소명의식을 가지고 구름 떼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시국선언문’과 ‘민주화 촉진 대운동’을 펼치면서 스크럼을 짜고 비폭력 평화적인 시위를 벌렸다. 피켓의 주요 문구 내용은 “비상계엄 해제하라” “정부주도 개헌 철폐하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물러나라” “유신 잔당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 진출을 꾀했다.

나는 내 참모들과 함께 학생들을 지휘하며 전체적인 흐름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셀 수 없이 많은 학생들이 운집한 상황에서 시위 경험이 없던 군중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내로 진출하자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나는 시내진출은 많은 사상자를 낳는다는 생각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군중들은 밀어 붙이기 시작했다. 나와 몇 몇의 진행 참모들은 통제하려고 힘을 다했으나 그 물결을 막지 못하고 있었다.

경찰들은 학교 밖 언덕 밑에 미리 잠복해 있다가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진출하자 이를 빌미로 마치 기다리기도 하듯 최루탄을 쏘며 무차별적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두환은 어쩌면 자기 집권을 위해 학생들의 분노를 유도한 것은 아니었을까? 학생들의 시위 수준에 대등한 진압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진압군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비폭력 무저항의 시위 학생들에게 몽둥이로 타격하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처음으로 최루탄을 경험했다. 나는 과거 4.19의 장면도 아마 이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했었던 것 같다.

바로 그 시간, 내 인생의 절대 절명의 순간이었다. 제일 선두에서 징을 들고 학생들을 지휘하던 나는 몸을 피하려던 순간 삼천여 학우들이 언덕 위에서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 나는 도저히 도망치는 모습을 학우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나는 “죽더라도 떳떳하게 조국의 민주화를 위하여 자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자”라고 생각했다. 나는 경찰들을 향하여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며 뛰어들었다. 그 결과 첫 번째로 경찰들에게 잡혔고, 학교 정문 옆 구석진 곳으로 끌려갔다.

 

진압군은 마치 흑기사처럼 방독면에 투구를 쓰고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몽둥이로 가격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 만세. 민주주의 만세. 아. 아. 민주...”.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신없이 얻어맞고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기억에 남는 것은 내 깨진 머리에서 피가 흘러 하수구 맨홀에 고이는 장면만은 지금도 내 가슴 속에 또렷이 자리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나는 뇌손상으로 인하여 더는 기억 할 수 없다. 이 내용도 수술 후 주위 친구들에 의하여 전하여 진 사실들이 포함되어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내 옆에서 함께 피 맺히게 외치던 내 동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가 눈을 처음 뜬 것은 아마 한달은 족히 지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단국대학교 앞 순천향 대학병원 902호 특실에 입원 겸 감금되어 있었고, 입원실 문 밖에는 계엄군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동안 나는 너무 큰 중상이라 두 차례의 부서진 두개골 개복 수술을 하고 두개골 대신 프라스틱 두개골로 이식시켜 놓은 후 였다. 중환자실에 있을 때는 의식불명인 식물인간이었는데 수술 후 일반 병실로 옮긴 후에 눈을 뜬 것이었다.

거의 한달을 식물인간으로 견뎠고 두 달은 의식이 불명확한 상태에서 병원 생활을 이겨낸 것이었다.

그동안 학교 문제는 휴학으로 처리되었고, 나는 춘천 집에 있으면 또 경찰들이 체포하러 올 것만 같은 불안감으로 고향인 정선 임계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 숨어서 지냈다.

어느 날 코스모스가 핀 시골길을 걸어 임계국민학교의 화성분교에 갔었다. 아버지와 고모들이 다녔던 전교생이 50여명도 안되는 소규모 분교였다. 아이들이 책을 읽는 소리와 풍금소리가 운동장을 지나 내 귀에 들려왔다. 너무 아름다웠다. 나는 한참 소리 없이 울었다. 그러는 사이 나도 책을 읽고 싶은 충동이 생겼으나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맑은 하늘에 내 얼굴을 비추고 셀 수도 없이 ‘너는 커서 무엇이 될래’ ‘무엇이 될래’를 새기며 또 새기고 울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잠이 들면 심한 가위눌림에 시달려 악몽을 되풀이하기 일 수였고 뭔가 불안한 심경을 통제 할 수 없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의 시간을 반복하고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나면서 나는 내 삶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가 이해 할 수 있는 동시, 동화책부터 시작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나도 작가의 길을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매일 몇 번씩 일기를 썼다. 1년 동안 엄청난 양의 책을 읽은 것 같다. 그러나 읽고나면 가마득히 잊어버리고 또 다시 읽고 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때 나는 신체적인 문제 특히 시야 협착 등으로 빨리 걷지 못했으므로 주로 천천히 산책을 한다거나 또는 독서가 내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소설, 한국 근현대 문학, 사회 과학 서적 등을 읽으면서 나는 반드시 다시 정상적으로 활동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과 함께 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지금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두 눈을 감고 무아지경에 빠져 최면을 걸기도 한다.

고향 마을 노인들은 경찰서 형사들이 돌아다니며 나에 대해 신원조회를 하고, 또 집안 어른들 중에 사상범이 있는지 등을 조사한 뒤인지라 처음에는 무슨 나쁜 이념에 물든 빨갱이 적색분자라 생각하고 거리감을 갖기도 했었다.

거의 1년이 지났다. 나는 대학생도 아니었고 이른바 운동권 학생도 아니었다. 고향 집은 전기는 들어왔으나 T.V도 물론 없었고 다만 라디오 정도만 들어오는 수준이었다. 그동안 시국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조부모님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간간히 나오는 뉴스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을 잡아들여서 조직을 캐고 있다는 소식만 무성했다. 조부를 따라 장날에 장터에라도 가고 싶었으나 나는 그럴 상황이 못 되었다. 나에게는 암흑시대였다.

그러던 중 학교에서 복학을 해도 된다는 소식이 왔다. 나는 정말 눈물이 나도록 기뻤지만 그러나 두려웠다. 이 상태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사건 후 1년 3개월 후인 1981년 2학기에 복학을 했다. 휴학기간 동안 군입대 신검통지서가 나왔는데 순천향병원의 진단서와 병력일지, X레이 사진 등을 제시하자 면제 통지를 받았다. 기억에 남는 것은 신검 판정관인 담당 군의관이 내 사진과 자료들을 훑어보더니 “아 정말 기적으로 살았구먼...”하던 기억이 난다.

학교당국에서는 3학년 1학기를 거의 수강하지 못했음에도 학교 측의 고려로 학점을 올 D를 받고 이수를 인정해 주었다.

 

후에 내 정신이 온전케 된 뒤에 읽었던 병원 진단서 내역이다.

병명 1. 우측 전두 측두 두정부 선상 골절

2. 뇌좌상(고도)

3. 우측경뇌막상 혈종

증상 : 사고 기억 및 판단 등의 정신 기능이 저하되어있고 양측 청력 및 시력 감퇴되었고 양안시야가 축소되어 있음.

상태 : 일상 거동은 가능하나 육체적 정신적 훈련이나 근무에는 임할 수 없음.

 

1983년 1월.

한 평생을 교사로 임하겠다고 다짐한 나는 다시 도서관으로 향했다. 아직 대학 졸업식이 한 달 반 정도 남아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능력을 기르는 길 뿐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1학년 공통수학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오로지 학생들을 지도 할 내용을 개념부터 철저하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권의 교과서와 참고서 한권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조차 내 능력은 완전히 소화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를 풀 때 과거에 내가 아주 쉽게 풀었을 문제를 나는 이해 할 수 없었다. 정답을 봐도 알 수 없는 문제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근무해야 할 학교로 전화를 걸어 교과서 출판사를 미리 알아내어 자습서를 구입하여 다시 공통수학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하면서 느낀 점은 내 기억력이 전과 같지 못하며 또한 오래 기억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상황이었다.

솔직히 그전보다 5배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두 배 정도가 아니라 다섯 배 훨씬 그 이상 이었다.

심지어는 부분적으로 어떤 때는 구구단을 외운 것도 헷갈릴 정도 였으니 그 상황을 누가 이해 할 수 있겠는가?

 

1983년 2월 말 나는 강릉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어머니께서는 눈물로 나를 배웅해 주셨다.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아들을 면회하지도 못하고 문 밖에서 밤을 지새우시던 가여운 어머니. 계엄군들에게 눈물 뿌리며 내 아들을 보게 해 달라고 울며불며 통사정 했던 어머니였다.

나는 외로운 항해를 시작하는 마음으로 대관령 아흔아홉 고개를 넘었다. 그리고 내 마음에 다짐을 했다. 이제 한 고비를 넘는 것이다. 인생의 내 삶에 아흔 아홉 고개보다 더 많은 고비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분명히 넘고 넘어 아이들에게 삶의 지평을 열어주는 교사가 되리라.

내가 학생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화려함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이 몸으로 아이들과 같이 뛰어 놀면서 그들의 젊음을 키우며 생활하고 싶었지만 그 부분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의 지경을 넓히는 진정한 교사가 되리라 다짐을 했다.

“ 그래. 너의 상처는 너 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잖아. 역사의 진실을 위한 거룩한 분노였잖아. 힘을 내. 분명히 할 수 있어. 하나님께서 네 기도를 그냥 흘려버리겠어?” 나는 다시 나에게 최면을 걸면서 학교를 찾아갔다.

학교는 강릉시내에 자리하고 있는 역사 깊은 인문계 고교였다.

학교장과 교감님 등에게 인사를 드렸더니 하시는 말씀이 “앞으로 아시게 되겠지만 우리학교 수학선생님은 수학을 부전공 하셨거나 또는 관련 유사 학과를 졸업하신 분들입니다. 에. 또 중등교사 양성에서 공부하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대학에서 수학교육을 제대로 전공하신 선생님은 김 선생 뿐입니다.

그러니 이과 중심으로 아이들을 잘 지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셨으니 우리 학교 아이들을 서울에 있는 유수 대학에 잘 진학 시켜 주기를 바랍니다. 나는 얼떨결에 “네”라는 대답을 하고 교장실을 나왔지만 가슴은 답답하고 두려웠다.

내가 담임하는 학급은 1학년 6반. 지도학급은 1학년 두개 반과 2학년 자연계 두개 반이었다. 1주일에 28시간. 보충수업시간은 8시간 합이 36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큰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지 그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학교 근처의 자취방에 짐을 풀고 당장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교재 연구였다. 한 학년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두 학년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짐이었다. 하지만 이미 각오를 한 상태였으므로 한 시간 분량의 학습 내용을 자취방에서 세 번은 꼭 풀어보고 출근을 했다. 처음에는 문제 해설 위주로 풀어보고, 두 번째는 소리 내어 설명하면서 풀어보고 세 번째는 어느 대목에서 아이들의 질문이 있을 것인가를 염두에 두면서 풀었다. 그러니까 매일 밤 1시 정도에 잠이 드는 일은 기본이었다. 우선 교과서 문제를 풀어보고 그리고 유사문제를 만들어보고 또 잃어버렸는지 다시 확인하고 아침 일찍 출근해서 다시 확인하고 이런 식으로 매일 반복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이런 내 행동은 어쩌면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내 생존에 관한 일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처음에 나를 제일 힘들게 한 일은 바로 술자리 문제였다. 동료 교사들은 새파란 초임 교사가 부임했으니 매일 축하파티를 하고 술을 권하는데, 나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왜냐면 술을 마시면 머리 속의 뇌가 팽창을 하는데 내 두개골을 플라스틱으로 씌웠으니 머리 속의 압력에 서로 잘 적응을 하지 못해 나는 심한 두통에 시달려야만 했다. 1차 그리고 2차. 어떤 때는 3차. 자취방에 도착하면 1시가 넘어서고 있었으니 거절 할 수 없는 이 자리는 나에게 너무나도 큰 고통이었다.

그렇다고 내 상황을 이야기 하고 동정을 구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원칙을 세웠는데 ‘술자리에는 가서 신나게 놀아주되, 술은 마시지 말고, 2차까지만 한다. 그리고 밤 샐 때까지 공부를 한다. 물러설 수 없는 이 원칙은 현재 22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오고 있는 큰 힘이다.

실제로 첫 해 삼사월은 일주일에 두 세 차례의 술자리가 있었다. 그 때 마다 나는 참석해서 술을 마시는 척만 하고 신나게 놀아주었다. 그랬더니 학교의 소문은 술이 무척 세고 매너가 좋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매년 5월은 정기적으로 봄철 교내 체육대회가 있는 날이다.

교무실 알림판에 교사 축구선수 명단이 붙었는데 거기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핑계를 댔으나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학생들은 반별로 오전과 오후에 경기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교사 축구시합을 관전하게 되었는데 우리 반 아이들은 담임선생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반 아이들을 두고 어디로 도망 칠 수도 없었고, 뇌손상으로 인한 내 눈의 시야 협착이 워낙 심하여 나는 공을 바라보면 사람이 안보이고, 사람을 바라보면 공이 안보일 정도였으니 수비수로 풀백을 보고 있는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혹여나 경기 중 넘어지거나 하여 머리에 손상을 입는다면 이 끔직한 일을 누가 감당한다는 말인가.

그날 나는 처참한 기분을 안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교사로 일평생 살아간다면 반드시 내가 해야 되는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 교육의 주체는 학생인데 학생들에게 수업시간에 수학만 가르치는 수업 말고, 무엇인가 내가 해야 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활동적인 성격인 내가 학생들과 체육활동을 같이 하면 더욱 좋겠지만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고, 그렇다고 수업만으로 아이들과 마음을 공유하기에는 수학 과목 자체가 아이들에게 흥미를 끌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택한 것은 글쓰기였다.

글쓰기는 특별히 몸으로 활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주로 책상에서 독서하고 원고지에 창작하는 일이라 생각했기에 내 상황에서는 최상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매일 해야 하는 일이 교재 연구와 글쓰기 두 가지가 된 것이다. 물론 중심을 둔 것은 교재연구였고, 틈틈이 독서를 하면서 글쓰기에 대한 습작을 시작했다.

신임 교사의 첫 해가 거의 끝나가는 12월 교장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그러면서 “ 김 선생님이 열심히 노력하셔서 학생들의 반응이 매우 좋습니다. 해서 부탁이 하나 있는데 유능한 수학교사 한명을 추천해주십시오” 나는 매우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사건은 나에게는 큰 영광이면서 뭔가 어떤 확신과 모양이 보이는 대목이었다.

1984년. 교사 2년차이다. 매일 매일의 계획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매일 퇴근하면 자취 방 책상에 붙어 있다가 후배교사와 같이 공부하고 또 내 교재연구가 끝나면 독서를 하고 밥도 해먹고 매일 그런 하루였다.

강릉에 있으면서 경포대를 한번도 나가보질 못했었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우선 심한 시야 협착으로 인하여 여전히 새로운 장소에서의 적응이 어려웠었다.

새 학기를 시작하기 전 봄 방학 동안에 처음으로 경포 바닷가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었다. 정상인으로 있을 때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지만 반맹증이란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겨울 바다는 아름다웠다. 시각 장애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밖에 볼 수 없었던 겨울바다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오리 바위와 십리 바위를 바라보며 백사장을 걸었다. 파도가 내 발 밑까지 다가와 조개 혓바닥처럼 나를 유혹하고 사라졌다.

경포 관광호텔에서 안목 항 쪽 철조망 끝까지 걸었다가 다시 걷고 또 다시 걸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처얼석 처얼석 솨아아아 부서지는 파도야 날 어쩌란 말이냐’ 이런 시구가 내 가슴을 후벼 팠다.

하루 종일 바닷가에서 산책하면서 내가 겪어 살아 내야하는 내 삶이 너무나도 잔인하게 물결쳤다. 갈매기도 내 머리 위를 빙 돌더니 나를 외면하듯 사라져갔다.

사라지는 갈매기를 향하여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80년 5월. 이른바 ‘모래시계’ 그 현장에서 그렇게 목청껏 외치며 피 흘리고 절대 반대 했던 ‘전두환 국군 보안사령관’은 제 11대 대통령이 되어서 압권정치를 하고 있었고, 광주 민주항쟁은 광주사태로 비하 하여 아무도 말 할 수 없는 극한 상황이었으며 나에 대한 상처도 그저 비밀을 지켜야만 되는 시대였다. 사회 분위기는 시민들도 서로 눈치를 살피면서 무표정해 있었고, 마음속에 응어리 진 가슴을 녹여내며 뭔가를 저주하고 싶은 마음들이 가득 찬 삶이었다.

나는 더듬거렸지만 그러나 용기를 내어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새로운 길을 한번 걸어 보았다. 그 표지판은 오죽헌 쪽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경포 호수 둘레 십 여리를 한 바퀴 돌고 경포대에 들렸다가 방향을 강릉시내 쪽으로 걸었는데 그 길이 오죽헌 쪽이었다.

“아니. 김 선생님 아니세요. 나는 깜짝 놀라서 바라보니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구영주’선생이었다. 구영주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심상’이라는 시 전문 잡지를 통하여 등단한 시인이었으며 여러 권의 시집도 상재한 지역의 유명 작가였다.

구 시인은 산책 중이었다. 나는 구 시인과 같이 길을 걸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처음으로 짤막하게 내 지난 사건을 이야기 했고, 앞으로 학교 특활시간에 동아리 활동으로 글짓기 반을 지도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씀 드렸고 가능하면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요즈음은 독서와 습작 중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구 시인과 걸으면서 자꾸 어깨와 가슴이 부딪쳤다. 발을 밟기까지 했다. 앞을 보면 옆의 상황을 가늠하기 어려웠고 또 옆을 보면서 이야기 하면 앞의 장애물에 자꾸 걸려 뒤뚱 거렸다.

구 시인은 “김 선생님은 눈이 많이 나쁜가 봐요. 나는 귀가 너무 안 좋아요. 중이염을 알았거든요 그래서 학생들의 말이 잘 안들려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많이 미안해요.”라고 말씀 하셨다. 그러면서 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셨다. “김 선생님 시를 써 보세요. 제가 함께 공부하면서 도와 드릴게요”

구 시인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80년 상황은 국민 모두의 큰 아픔이지요. 그 때 저는 교육자라는 사실이 매우 부끄러웠습니다. 우리 선생들의 마음이 모두 새가슴이라서 가만히 숨죽이고 있지만 사실은 거의 모든 교사들이 가슴으로 울고 있었을 거예요. 선생님의 상처는 영광의 상처예요. 반드시 우리시대에 드러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역사 앞에 바로 설 수 있지요. 김 선생님 하고 싶은 말을 시를 통하여 표현 하세요. 몸은 제한적이지만 정신의 세계에는 장애가 없어요.” 이렇게 제안을 하셨다.

 

구 시인의 의견으로 나는 다시 동기 유발을 위해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 그래 너의 이야기를 해 보는 거야. 네 삶에 생채기를 풀어보는 거야. 지금은 시대가 마치 일제 식민정치 때와 같이 숨죽이고 있잖아. 때가 이르면 네 고통이 영광이 될 수도 있어. 고난이 깊을 수록 이 땅의 평화와 기쁨이 더욱 의미 있는 거야. 누가 이 흐름을 막을 수 있겠어.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드리면서 인류를 구원하였듯이, 너는 너를 통하여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역사를 한 뼘이라도 당기는 거 아냐. 그래 글을 써. 김지하를 능가하는 글을 쓰는 거야. 네 혼의 소리를 글로 표현하자.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한번 생각해봐.”

글쓰기 공부를 하는 작업이 좀 더 구체화 되었다. 나는 주로 ‘창작과 비평사’ 와 ‘실천 문학’ ‘풀빛’ 등에서 나온 시집 중심으로 문학 공부를 해 나갔다.

1984년도에 내가 지도하는 학급은 2학년 자연계 학생들이었고 담임도 그 반 중 하나였다. 첫 해에 두 개 학년을 지도하다가 한 학년으로 줄어드니 내 시간에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그 시간에 나는 독서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작가의 꿈을 이루어갔다.

1985년 신학기에 ‘전순표’라는 선생님이 부임을 했다. 신철원고등학교에서 사립학교로 오셨는데 나는 그 선생님과 눈빛만 봐도 서로의 생각을 알아차릴 만큼 아주 가까워졌다.

전 선생님은 교육에 관해서 나보다 더욱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학교 현장에서의 혁신을 강조하셨고, 구습에 젖어있는 단위 학교의 병폐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그리고 학생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그런 생각들을 가르치셨다. 나는 오랜만에 신선한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마음에 새로운 기운이 돋기 시작했다.

전 선생님은 원래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셨는데 수학을 가르치셨다. 나와 같은 과목임으로 의문 나는 부분들을 서로 토론해 가면서 서로 가깝게 지냈다.

그리고 서로 읽었던 책 가운데서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가지고 토론하면서 의식의 지경들을 넓혀나갔다.

처음에는 서울에서 발행하는 최완택 목사님 주관의 ‘민들레 이야기’라는 성서 모임을 하면서 ‘강릉 민들레’라는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었다. 어려운 아이들을 돕기도 했던 것 같다.

모든 모임은 거의 내 자취방에서 이루어졌다.

그 때 우리 사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안정화된 듯 조용했지만 지식인들은 ‘비극의 시대’라고 불렀다. 모든 문화가 더욱 서울 중심으로 고착화 되었고 지역은 서울에서 배급받는 문화를 전달 받는 수준에 불과 했다. 지역에서 어떤 특화된 문화 상품을 개발하여 보여 주는 것 자체를 마치 무슨 반미나 용공주의자로 몰아부쳤고 전두환 정권은 그런 치밀한 개별 작업들을 교묘히 이용하면서 해당자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전순표 선생님과의 사귐은 강릉지역의 많은 분들을 만나게 했다.

함영회 세무사, 목영주 사장님, 홍재경 한의사, 나해철 시인, 이유순 약사, 김영욱 시인, 김영현 시인, 이 철 교수, 최수영 기자. 강헌수 교수 등.

그 때는 학생들이었지만 지금은 어엿한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시기에 만든 책이 1985년에 나온 강원도 최초의 민중문화무크지 ‘새벽들’이다. 서울에서 출판사를 경영하시던 함영회 님의 도움으로 출간된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보람과 기쁨을 느끼면서 한없이 울었다.

출판기념회도 거창하게 할 수도 없었지만 우리는 작은 찻집에서 노래를 부르며 시를 읽고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밤새도록 서로의 아픔을 나눴다.

물론 이 자리에 형사가 왔다 갔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7년 새벽들 2집은 또다시 발간되었다.

 

학교에서 나는 작년과 같이 2학년 자연계 학생들을 맡아서 수학Ⅱ 과목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 과목은 이년 동안 매일 밤 1시까지 공부하면서 교재연구를 한 과목이었다. 그러니까 계속 3년을 가르치게 된 셈이었다. 학교에서는 정규 수업이 끝나고 특별 반으로 ‘심화반’을 만들었는데 그 반을 맡기셨다. 그 반의 수업 수준은 서울대나 연 고대 중심 반으로 지도했는데 나는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 뇌손상 과정에서 잘려나간 신경들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심한 시야 협착과 이명현상, 기억 장애는 나를 괴롭혔다.

모든 것들을 접어두고 심화반 교재 연구에 매달렸다. 지금 생각해 봐도 이 상황에서 감사한 것은 그렇게 캄캄하게 안 보이는 시각 장애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그 뇌의 한 부분은 남겨 놓았을까? 하는 의문이다.

지금 생각해 봐도 너무 감사하고 다행인 셈이다.

문제는 여전히 어려웠지만 그만큼 많은 준비를 해야만 했다. 수학 문제 하나를 하루 종일 매달려도 안 풀리는 문제도 있었다. 아이들을 바라보기가 두려웠다. 혹여나 서울대 반 아이들이 문제를 가지고 와서 질문이라도 할 때면 나는 온몸에 땀이 배일 정도였다.

내가 잘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처음에는 그 자리에서 풀어 보려고 애썼지만 문제의 난이도에 따라서 그렇게 쉽게 해결하지 못했다. 그럴 때 아이들에게 “ 지금은 잘 안 풀리는데 선생님이 한번 풀어본 후 가르쳐 줄게” 이렇게 말하기가 참 어려웠다.

심지어는 어떤 학부형이 일본 여행 중 동경대학 시험문제 책자를 구입해 와서 아이들에게 풀어 달라는 요청까지 있었다.

그러던 중 나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정부에서 시행하는 교단 선진화의 일환으로 각 교실마다 T.V를 두 대 씩 설치했는데 그 위치가 칠판 바로 양 옆에 블록하게 튀어 나와 있었다. 그런데 수업을 하면서 나는 늘 바닥의 교단 끝 부분과 교탁등이 안보여서 조심했는데, 잘못하면 헛집어서 넘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수업 중 그만 T.V상자 모서리에 머리가 강하게 부딪치고 말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부분은 내 두개골 파손으로 인하여 플라스틱으로 덧 씌워진 부분이었다. 나는 강한 충격으로 순간적으로 잠시 혼절해 버렸다. 한 5초 지났을까. 나는 주저앉아 있었고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책상을 치며 웃고 있었다. 아마 내가 과장해서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었나보다. 이런 상황을 늘 염두에 두고 있던 나는 상황을 금방 파악하고 허둥대며 잠시 학생들을 피해 숙직실에 가서 누워 버렸다.

두 눈에는 눈물이 쉼 없이 흘러 내렸다.

젊은 청년을 비참하게 때려 만신창이로 만든 압제의 괴수는 청와대에 앉아서 자신의 하수인들과 권력 욕심을 채우고 있는데 초라한 나는 비참하게 평생을 이렇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아. 대학 때 내 친구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고생하고 있을까. 잡혀간 친구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나만 살자고 동해안에 와서 너무 편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내 희망은 무엇일까. 나는 지금 밤 낮 내 몸둥아리만 조신하며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 매달리면 된단 말인가. 아이들은 저렇게 웃고 있지 않는가. 그 소리는 나를 비아냥거리듯 들려왔고 내 한계를 절감하는 소리 같았다.

그렇지만 이 몸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1986년 춘천 집에서 연락이 왔다.

어머니께서 건강이 안 좋으시다는 이야기였다.

80년 이후 하루 한시를 오직 자식 걱정에 매달리셨던 어머니. 자식 잃는 두려움과 노여움으로 화병으로 고생하셨던 어머니께서 수족이 조금씩 떨리는 파킨슨 씨 병에 걸리신 것이었다. 나는 혼자 강릉에 있을 수 없었다. 동생 둘이 고등학생과 대학생인데 아무래도 춘천으로 학교를 옮겨야 되는 상황이었다.

때마침 춘천 모교에서 학급 증설로 인하여 수학교사가 필요하니 와 줄 수 있겠냐는 교사 초빙 제의가 있었다.

 

1987년 3월. 나는 강릉에서 부모님이 계시는 춘천으로 근무지 학교를 옮겼다.

강릉에서의 만 사년 동안의 교직 생활은 내 건강 상태의 좌절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 건강 상태가 좋아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내 상황에 익숙해 진것이라고나 할까. 길을 걷다가 부딪치거나 넘어진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없었다. 나는 내 자신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므로.

춘천에서의 생활도 나는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강릉에서의 생활 패턴을 그대로 이어갔다.

모교에 부임한 후 첫 학기 특별활동 반으로 ‘문예반’을 조직했다.

수학선생이 문예반을 맡는다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선생님들이 있었지만 그런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문학에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속될수록 우리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고, 머리 좋은 아이들은 금방 알아차렸다. 아이들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옮겨 나갔고 그리고 춘천 경찰서 형사과에서 조사를 시작했다.

“ 선생님. 이상해요. 어제 밤에 형사들이 우리 집에 왔었는데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아버지한테 도장 받아갔어요” “ 이것 맞지. 이렇게 말했지. 야 임마 똑바로 말해 ... ” “느네 선생은 운동권 선생이야. 임마.” 그리고 종이에 미리 적어온대로 확인 받고 갔는데 자신이 말하지 않은 것도 ‘그랬을 거라며’ 조서를 받아 갔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정공법으로 한겨레신문 기자에게 연락을 해서 학생들을 대면시켰다. 그 결과 경찰에서는 내가 담임하고 있는 반 학생들 가정을 찾아다니며 이미 작성해온 내용을 확인하는 중이였다.

다음 날 아침 ‘한겨레 신문’에 타이틀로 큰 기사가 났다. ‘경찰, 교사 학습권 침해“

아침에 출근하자 교장이 불렀다.

교장은 이북에서 6.25 때 월남한 북한출신으로 본교를 세운 설립자 겸 이사장이었다.

“김 선생이 빨갱이를 알기나 해. 일본에 가 보라고. 빨갱이들이 일본 교육을 다 망쳤어, 그런데 왜 김 선생이 아이들에게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수학 선생은 수학이나 잘 가르쳐야지... 내가 북에 있을 때 공산당 놈들이 하는 걸 온 몸으로 겪었어”하면서 원색적인 언어를 퍼부었고 나는 졸지에 빨갱이가 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는 강릉에 있던 나를 추천한 교감선생님이 배석했었는데 얼굴을 못 들고 있었다. “ 이 교감이 알아서 해요. 돌다리를 잘못 짚었어”. 교장은 화를 벌컥 내며 나를 위협했다.

그러나 어디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었는가. 나는 아이들과 더 열심히 연습을 했고, 학생들은 나를 잘 따라 주었다.

첫 해 가을에 학교 축제 ‘삭주제’가 열린 날. 난 우리 문예부 학생들과 함께 ‘문학의 밤’을 공연했다. 대본을 쓰고 연출을 하면서 1시간 30분 분량의 시극을 만든 것이다.

연극도 아닌 것이 물론 오페라도 아닌 것이, 연기와 춤과 노래 그리고 시낭송을 자유롭게 이어지면서 학생들은 공연이 펼쳐졌다.

공연 결과는 대 만족이었다. 학생들과 교사들 그리고 동문들은 모두 탄성을 질렀으며 문예부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

아. 이제 교사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1987년부터 2004년 까지 18년 동안 나는 모교에서 계속해서 수학교사로, 문예부 지도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일명 ‘수학선생 문학박사’ 이런 호칭도 함께 생겼다.

매년 축제 때 마다 대본을 써서 공연을 하고, 공연 날이면 타 학교 여학생들로 장사진을 치기도 했었다. 그리고 문예부 학생들은 각종 백일장에 나가 많은 상을 받기도 했다.

강원대학교 백일장 장원. 만해 축전 백일장 특상. 김유정 백일장 장원. 기타 각종 대회에서 학생들은 많은 상을 받으며 나를 얼마나 기쁘게 했는지도 모른다. 학생들이 상을 받을 때 마다 나는 지난 순간들이 한 장의 그림처럼 비구상으로 펼쳐진다.

아이들과 함께 ‘동그라미’라는 시집도 꾸미고 함께 시 낭송회도하고 시화전도 매년 열린다. 학교 어떤 교실에 들어가도 교실 벽에는 시화가 한두 점은 걸려있다.

 

북한강 밤바람이 운동장을 가로 질러 불어오더니 내 얼굴을 훑고 다시 교문 앞 은사시나무를 흔들고 사라진다.

간간히 창문을 통해 비쳐지는 교실 불빛에 작은 나뭇잎들이 짤랑이며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교실 안에는 학생들이 밤늦도록 야간학습을 하고 있다.

“땡 땡 땡”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밤하늘에 흩어진다. 아마 키 작은 교무주임이 벽돌을 두개 올려놓고 그 위에 올라가서 발끝을 가득 세워 가까스로 줄을 당겨 종을 쳤을 게다.

1987년에 춘천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에 부임하고 나는 이 광경을 처음 보았을 때, “교무주임님 그렇게 어렵게 매달리지 말고 줄을 길게 달아요. 그러면 벽돌을 옮기지 않아도 되잖아요. 라고 했더니 “아니 김 선생. 그러면 얘들이 매일 종을 쳐서 정신이 헷갈려요. 그냥 나만 좀 고생하면 되지요”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에도 벌써 십 수년째 야간 당번 날만 되면 줄에 매달려 종을 친다. 이 종은 학교 설립자가 육이오 한국 전쟁 때 포탄으로 썼던 탄피를 개조해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으로 봐서 전쟁 후 학교를 처음 세울 때부터 사용하고 있는 학교 명물이 되어버린 흉물 종이다.

고요하던 학교가 종소리와 동시에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책상 끄는 소리 창문 여닫는 소리 담임선생들이 출석부로 책상을 두들기며 악을 쓰는 소리 등이 울린다. 잠시 후 교실에서 한꺼번에 아이들이 밀려나오는 모양이 빙어 떼들이 터진 그물을 빠져 나가듯 복도와 계단을 지나 운동장으로 흩어진다.

어떤 학부모들은 교문 앞 도로 옆으로 차를 세워두고 각자 자기 자식들을 찾느라고 야단이다. 부모들이 소리 질러 다급하게 부르는 아이들의 이름은 가로등의 거미줄처럼 서로 엉켜 도로위에서 퍼득인다. 그 소리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아이들은 도로를 무단횡단 하더니 번개시장의 파장 풍경처럼 익숙하게 집으로, 독서실로, 더러는 학원으로 사라진다.

밤 10시가 조금 지나면 나는 학교 계단 앞에서 아내를 기다린다. 나는 밤에 낮의 반 밖에 볼 수 없다. 아내가 먼저 차를 가지고 와 있기도 하고 더러는 내가 좀 기다리기도 한다. 오늘은 내가 한 5분정도를 기다린 것 같다. 교문으로 들어오는 자동차 불빛이 아슴히 보인다. 불빛은 늙은 토종개의 깃털 색깔처럼 축 쳐져있다. 시동이 꺼질 듯 쿨럭이던 자동차는 늦게 나가는 아이들을 피해 운동장을 이리 저리 구르며 천천히 다가오더니 내 앞에서 멈춘다. 창문이 열리면서 “아빠” 하고 나를 부르는 세 딸들의 목소리.

“어어. 웬일이냐. 오늘은 우리 세쌍둥이가 다 왔네” 나는 차 안으로 들어가면서 아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아내는 “오늘 별일 없었어요?” 하고 묻고 나는 “ 부모님은 괜찮으신가?” 하고 대답한다.

초등학교 3학년인 세 딸은 모두 같은 반이다. 한 학년에 두 학급 밖에 없는 학교라서 학급 인원이 스물 네 명인 반이니 여덟 명 중의 한 명이 내 아이인 셈 이다.

세쌍둥이는 동시에 내 귀에다 대고 쉴 새 없이 뭐라고 종알거린다.

우리 집은 길게 늘어진 만리장성 같은 미군부대 블록 담 끝머리에 있다.

미군부대 철조망 위에는 노란 황색 나트륨 보안등이 켜져 있고 그 불빛은 밤새도록 우리 집 창 밖을 비추곤 한다.

 

결혼 후 8년 만에 세쌍둥이가 태어났다.

1988년 교회 청년회에서 만난 아내 김경민은 숙명  

장석천 2015.08.08 13:45:29 댓글달기 삭제
계속 읽고 싶은데 도중에 본문이 끊어진 것 같습니다. 이어서 다시 새로운 글로 올리시면 어떨까요?
김홍주 2015.08.10 00:19:39 댓글달기 삭제
네. 정목사님. 과연 어느분이 읽으실까? 했는데 끊어졌네요. 내일 뒷부분 다시 올릴께요.  부족한 사람이 십몇여년전에  썼던  내용입니다. 평안하세요.^^